
휘어지는 선
2025, 합성수지, 스틸, 사진 UV 프린트, 에폭시 레진, 가변크기
휘어지는 선
서울은 좁고 우리는 빽빽하다. 통과공간인 길거리는 진공상태가 되지 못하고 너와 나의 공간이 조금씩 걸쳐진 회색지대, 치열한 영역 다툼의 현장으로 자리 잡았다. 금지, 주의, 조심을 말하는 표지판은 그 위에 불안정한 경계를 세우고, 임시적 규칙을 만든다. 이렇게 그어진 통제의 선 이면에는 타인을 향한 신뢰의 결핍과 다정한 걱정이 뒤엉켜 있다. 그로부터 생성된 질서는 무심한 침범과 암묵적 허용으로 인해 쉽게 흩어지고 변형되며, 재구성된다. 질서의 굴절은 때로는 집단의 긴장을 키우지만, 한편으로는 접촉과 연결의 역동성을 확장한다. 투명한 표면 위에서 유연하게 구부러진 도시의 구조들은 유기적 변주의 가능성을 그린다. 도시는 유연한 물질이다. 이렇게 도시가 휘어진다.



<휘어지는 선_벽>, 2025, 스틸, 합성수지, UV 프린트, 에폭시 레진, 200 x 135 x 4 cm



<휘어지는 선_펜스>, 2025, 아크릴 판, 스테인리스 스틸, 바퀴, 합성수지, UV 프린트, 가변크기

<흩어지는 선>, 2025, 석회 분말, 가변크기
<구르는 선>, 2025, 직물, 아크릴 페인트, 에폭시 레진, 27x 27x 27 cm


<휘어지는 선_바닥>, 2025, 아크릴 파이프,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스틸, 합성수지, UV 프린트, 에폭시 레진, 가변크기.
도시를 조직하는 구조들이 있다. 도로는 이동의 방향과 방식을 지정하고, 벽은 안과 밖을 가른다. 펜스는 광장 위에 선을 그어 구역을 분할하고 외부자의 진입을 막는다. 그리고 길거리는 통과를 위한 빈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대기의 저항이 없는 진공에서 유유히 전진하는 사물처럼, 도시인의 막힘없는 이동을 위해 존재하는 곳. 그러나 서울은 좁고 우리는 빽빽하기에, 그곳은 너와 나의 영역이 조금씩 걸쳐진 회색지대, 치열한 영역 다툼의 현장으로 자리잡았다.
나의 주차장, 담벼락, 창문, 폐기물 수거장과,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길거리의의 가름선은 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장소를 점유한 사람들은 표지판을 세워 영역의 소유권을 공표하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려 한다. 마치 그곳을 지나는 익명의 사람들이 천방지축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차금지, 흡연금지, 진입금지, 쓰레기 투기 금지, CCTV 녹화 중을 말하며 세세하고도 집요한 경고장을 날린다. 동시에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누군가의 불의의 사고를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의 일처럼 미리 염려하며, 계단 조심, 충돌 주의, 미끄럼 주의를 말한다. (물론, 반쯤은 책임질 일을 미리 피하고 싶은 마음인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다.) 이렇듯 표지판은 벽, 바닥, 펜스와 같은 도시의 구조물 위에 밀착해 숨을 쉬는 대상이자, 경계를 세우고 규칙을 만들어서 스스로 도시의 구조가 되고자 ‘시도’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너와 나의 경계가 흐릿한 관계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애써 그은 통제의 선의 밀도는 낮다. 부피를 키우고 수를 늘러 도시를 빽빽이 채운 표지판이 그리는 경계와 규칙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임시적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선의 안쪽이 나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심히 침범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의 점유자의 암묵적 허락을 기반으로 가능하다.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오는 타인을 마주할 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몸짓으로 약간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 도시의 신뢰는 어쩌면 ‘선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닌, 당연하게 선 안으로 들어온 당신이 ‘내 공간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에 대한 믿음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지표는 우리가 이웃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진입은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종이의 양면과 같은 소란함과 유동성의 도시에서, 사회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규범들은 개인, 그리고 집단이라는 물질을 만나 쉽게 굴절되고, 경계와 규범은 끊임없이 재설정된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하고 단단한 틀처럼 느껴지는 이 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을 뒤틀며 형체를 바꾸고 있다. 모든 사회는 일종의 놀이터와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놀이의 방식은 단단한 시설물이 결정하기보다는, 그곳에 머무는 이들의 접촉을 통해 생겨나고, 변형되며, 흩어지고, 재구성된다. 투명한 표면 위의 도시의 구조물은 유연하게 구부러진다. 바퀴가 달린 펜스는 관객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고, 임시로 그어진 선을 작은 발걸음에도 흐트러지며, 당신을 cctv로 감시한다고 말하는 공은 굴러다녀 그 누구도 감시하지 않는다. 유기적 변주의 가능성, 그로부터 도시가 휘어진다